미드소마 포스터

영화 미드소마의 줄거리를 짧게 짚고 바로 결말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영화가 흘러갈 수록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지 의문인 상태에서 다니의 옅은 미소로 마무리 지어지는 결말에 대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뜨악한 표정으로 극장을 나섰을 테니까요.

 

-어두운 화면-

영화는 연락이 되지 않는 다니의 동생과 다니의 메시지로 시작을 합니다. 평소 조울증을 앓고 있던 동생이 의미심장한 메일을 남기고 전화도, 답장도 받지 않으니 애가 타는 다니는 부모님께 전화를해 음성 메시지를 남깁니다. 전화기 속에서 다니의 음성이 흐르는 동안 카메라는 곤히 잠들어 있는 다니의 부모님을 비춥니다. 불안함에 잠을 못 이루는 다니는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자신의 불안을 호소하고 다시 친구에게 전화해 자신이 너무 남자친구에게 의존하는 것 같다며 또 다른 불안감을 털어놓습니다.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오랫동안 여자친구 다니와 헤어지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많은 않습니다. 친구들 역시 다른 여자를 만나라며 크리스티안을 부추깁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다니의 동생은 가스 흡입으로 부모님을 살해하고, 자신 역시 자살해버립니다. 오열을 하는 다니와 그를 쓰다듬는 크리스티안. 모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밖은 물론 실내도 어두컴컴한 화면입니다.

색감과 영상미로는 공포영화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어두운 실내를 비추는 빛-

다니는 동생과 부모님의 죽음으로부터 감정을 추스려가지만 문득 문득 가족을 상기시키는 요소가 있으면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오열에 가까운 그녀의 울음은 슬픔보다는 불안과 공포에 가까운 듯 합니다. 다니와 크리스티안의 관계도 아슬아슬합니다. 처참히 가족을 잃은 여자친구와 쉽게 헤어질 수 없는 크리스티안. 홀로 남겨지는게 두려워 필사적으로 크리스티안에게 맞춰주는 다니. 쉽지 않은 관계입니다. 이들의 일상에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친구들과 함께 스웨덴 하지제를 보러 여행을 떠나기로 한 크리스티안이 얼결에 다니를 초대해버립니다. 이때까지도 화면은 대체적으로 어둡지만 어두운 공간에 밝은 빛이 스며들어오는 장면이 많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야외공간-

스웨덴에 도착한 이들. 그들을 따라가는 카메라 무빙은 세상이 뒤집혔음을 암시합니다. 이 때부터 눈이 시릴정도의 밝은 장면이 이어집니다. 페레의 공동체 마을에 도착함과 동시에 이들은 대마와 버섯차를 즐깁니다. 이 공동체에는 뒤에도 지속적으로 환각제를 사용하는 장면이 많은데, 이 부분이 바로 지역의 토속신앙, 오컬트 적인 부분을 강조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초대받은 외부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때부터 현실과 환각을 혼동하기 시작하고 정신과 육체가 이곳 사람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5월의 여왕이 되어 권력을 쥔 다니.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 논문을 위해 펠레의 초대로 이곳에 방문한 크리스티안과 친구들 그리고 다니. 런던에서 머무는 펠레의 형이 초대한 런던의 커플. 이 여섯 외부인들은 공동체를 최대한 존중하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딱히 낯설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문화권이 다른 외국에 나갔을 때, 그곳의 문화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다른 여행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의 태도가 갈리는 시점은 두 노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삶을 마치는 장면부터 입니다. 런던의 커플은 충격으로 심한 반발을 일으키며 그곳을 떠나려 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몇몇 일행, 특히 조쉬는 심지어 그들이 뛰어내릴걸 알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조쉬의 태도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포인트가 있는 듯 합니다. 그들의 문화에 고함을 치며 잘못됐다고 하는 런던 커플의 태도가 옳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고수해온 문화이니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쉬의 태도가 옳을까요.

공동체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계속, 점점 그 강도가 심해집니다. 그들이 신성시 여기는 경전은 아무 의미 없어보이는 듯한 그림을 누군가가 해석한 것에 불과하고, 음식에서는 알 수 없는 재료들이 등장합니다. 외부인들은 하나 둘 씩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지고, 해가 지지 않는 하지인 탓에 시간 감각도 흐려집니다. 

이와 동시에 다니는 다른 누구보다 적응을 잘 하는 듯 합니다. 크게 트러블도 없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해야하는 노동도 잘 참여합니다. 그녀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에서 메이퀸으로 뽑히기까지하며 공동체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잡아갑니다. 외부인에서 점점 공동체의 권력을 쥔 사람으로 위치가 바뀝니다. 이 공동체 문화에 융화되지 못한 다른 이들은 점점 제거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외부인인 크리스티안은 다니가 손수 선택해 제거합니다. 외부인들은 모두 제물로 바쳐져 불에 태워지는 동안 이곳의 여왕이 된 다니는 드디어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속에 융화되어 기쁨의 미소를 짓습니다. 

원하는 바를 쟁취한 듯한 그녀의 미소

미드소마에 대해 분명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는 공포영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악령이나 귀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있을 법한 일인듯 합니다. 혹자는 정신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렸다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이비 '종교'라는 단어가 담지 못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공동체, 즉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모습처럼 신앙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에 녹아있고, 종교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어 굴러갑니다. 더불어 다니에게 부재했던 요소는 가족입니다. 스웨덴의 이 공동체가 바로 다니에게 부재했던 부분을 완벽히 채워줌으로 인해 다른 윤리적, 문화적, 사회적 요소는 다니에게 저 이상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됩니다. 미드소마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영화지만 생각할 거리도, 신선한 충격도 가득해 뻔한 스토리에 이골이 났다면 추천하는 영화 입니다. 

산뜻한 디자인의 표지

 

인간은 왜 여행을 떠날까요. 인스타를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값진 경험? 책 <여행의 이유>는 김영하 작가의 경험과 고찰이 담긴, 그의 시각으로 인간이 왜 여행을 떠나는지에 대한 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고심입니다.

 

시작은 가볍게 작가의 경험으로 시작합니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비자가 없어 바로 출국을 해야 했던 이야기, 낯선 유럽 땅에서 현지인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 뉴욕에서 방관자로써 시위에 참여했던 이야기 등 그의 여행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합니다. 누구나 갈 법한 곳을, 누구나 갈 법한 방법으로도 가고, 그였기에 가능했던 여행 방법으로도 갑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내면에는 그가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인간은 왜 여행을 할까요?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어디까지가 여행이고 어디까지가 여행이 아닐까요? 

 

저는 작가와 비슷하게 유년시절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작가와 비슷하게 타지에서 꽤 오랜기간 머물렀던 경험도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의문, 반 현지인, 반 여행자의 이도 저도 아닌 신분으로 혼란스러워했던 기억,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의 내 입지, 앞으로 머물 곳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는 모순된 불안감. 이 모든것에 대한 절대적인 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정 부분의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었고 또 하나의 다른 해석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크게 공감되었던, 근 몇 년 간의 화두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문단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 년을 넘게 살았지만 곧 자리를 털고 떠날 구경꾼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는 그 사회에 아무 책임도, 의무도 없었다."

인상깊게 읽은 부분의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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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궁극의 미니멀라이프

아즈마 가나코 씨의 책 <궁극의 미니멀라이프>를 읽었습니다.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함께 그닥 길지 않은 책입니다. '4인가족 한 달 전기료가 500엔' 이라는 책 홍보 문구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책은 미니멀리즘에 대한 의미와 사상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책은 아닙니다. 다만 일본의 한 엄마이자 아내인 주부가 자신이 실행하는 미니멀라이프를 공유하고 자신의 노하우와 실천 방법들을 간단하고 가볍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무리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도 이러기 쉽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대학에서 환경을 공부하고, 대학시절 전기도 수도도 없는 외진 곳에서 농활을 다녀온 경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값진 경험에 큰 영향을 받은 듯한 작가는 다른 미니멀리스트들과는 한단계 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흔히 접할 수 있었던 미니멀리스트들은 독신이라던가, 아이가 없다던가 등의 가족관계 역시 미니멀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즈마 가나코씨는 남편이 있고, 두 아이가 있습니다. 특히 학교를 들어가지 않은 아이에게는 꽤나 많은 살림이 필요할 거라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읽으니 꼭 그런것도 아닌듯 합니다. 작가의 미니멀라이프는 물론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전기료가 그냥 500엔이 나오는게 아닙니다. 세탁기가 없어 손빨래는 물론이고, 냉장고 역시 없어 가능한 모든 반찬은 저장음식, 절임, 말린음식으로 해결합니다. 청소기가 없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전구 역시 딱 세개만 있어 밤이 찾아오면 그냥 불을 끄고 잔다고 합니다.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간단한 채소는 집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습니다. 달걀은 키우는 오골계로부터 얻습니다. 

 

내가 미니멀라이프를 해도 이 물건은 버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물건 역시 그 쓰임새와 용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고, 과연 내가 얼마나 그 물건의 가치를 사용하고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다른 미니멀관련 서적과는 다르게 미니멀을 이렇게 해야지 보다는 미니멀을 하려는 목적을 다듬을 수 있었던 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아즈마 가나코씨 같은 미니멀한 삶을 살려면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하고 불편한 점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딱 그만큼만 시간을 소요하고 나머지는 오히려 물질로부터,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소유욕을 채우느라 너무나 많은 돈을 벌고, 그 돈을 벌기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요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본인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면 자신의 일상과 집 안을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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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의 책 비커밍

민트색의 산뜻한 책 미셸 오바마의 비커밍을 읽었습니다. 자서전인데다가 워낙 두꺼워서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주위에서 책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눈 딱 감고 첫장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이 두꺼우다보니 오디오북으로 많이들 읽는것 같았습니다. 저는 전자책으로 대여를 해 출퇴근 시간에 오며가며 읽었습니다. 너무 부지런히는 아니지만 틈틈이 읽다보니 다 읽는데 세 달이 걸렸습니다. 

 

책 비커밍은 미셸 오바마의 유년시절부터 가정환경, 법률회사에서 근무하던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던 시절 인턴인 오바마를 만나게 되어 오바마의 정치, 대통령 당선과 재선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아마 유일무이한 캐릭터의 퍼스트 레이디가 아닐까 싶은 미셸 오바마 입니다. 오랜 지병으로 몸이 불편했던 아버지와 미셸이 슈퍼스타로 삼았던 오빠, 사랑이 많고 야무지던 어머니와 함께 전형적인 흑인 가정에서 자랐지만 똑똑한 덕분에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물론 수없는 인종차별과 여자이기 때문에, 가정 환경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가능성을 의심받아오며 살았습니다. 이런 그녀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가족, 멘토들, 좋은 친구들, 커뮤니티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성장과 고충을 보면서 많은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많이 무기력한날도 많았지만 그런 날은 미셸오바마의 비커밍을 꺼내어 읽으면 그녀의 에너지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의 임기가 끝난 후 책 비커밍으로 이름을 날리며 투어를 하는 미셸 오바마덕에 요즘 버락 오바마는 자신을 전직 대통령이 아닌 미셸 오바마의 남편이라고 소개한다고 합니다.

 

비커밍은 워낙 두꺼운 책이라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저 처럼 여러달에 걸쳐 두고두고 읽으시는 것도 괜찮다면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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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밤조림

영화 리틀포레스트 속 밤조림을 기억하시나요? 한국판 영화에도 등장했지만 일본판 리틀포레스트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유행처럼 밤조림을 만들고 각자의 레시피를 공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들기에는 보기에도 번거로워보이지만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 레시피를 공유해보겠습니다.

 

밤조림은 보늬밤이라고도 합니다. 보늬는 순 우리말로 나무열매 속 껍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외국어인 줄 알았는데 예쁜 순우리말이라서 참 놀랍죠? 보늬밤은 이름처럼 밤의 속 껍질을 살려서 요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보늬밤은 겉껍데기만 제거하고 속껍데기를 살려서 조리합니다. 거칠거칠하고 질겨 식감이 안좋을 것만 같은 이 율피가 보늬밤의 핵심입니다. 때문에 이 율피를 먹기 좋은 식감으로 만드는 과정이 보늬밤 만드는 과정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선 밤의 겉껍질을 전부 까줍니다. 뜨거운 물에 30분 정도 불렸다가 하면 까기 편해요. 이 때 주의할 점은 가능하면 최대한 속껍질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속껍질이 다쳐서 속살이 드러난 밤은 오랫동안 조리는 과정에서 다 흐물흐물해져 결국은 깨지더라구요. 밤 양이 많다면 밤 깎는 칼을 이용해 밤을 까는 것을 추천해요. 저는 처음에 밤 속 껍질을 안 다치게 하려고 밤 까는 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로 살살 했는데, 손이 너무 아파 결국은 밤까는 가위로 깠어요. 요령만 생긴다면 생각보다 밤 속껍질을 안 건드리고 까게 되고 과도보다 훨씬더 편하더라구요. 이 때 썩은 밤이나 벌레먹은 밤이 있다면 그 부분만 잘라내지 말고 과감하게 버려주세요. 밤이 일부만 썩어도 그 쓴 맛이 밤 전체에 퍼져서 맛이 없습니다.

속껍질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주세요.

다 깐 밤은 중량을 재 놓고, (설탕의 양 때문에 밤 무게를 알면 좋지만 저울이 없다면 눈 대중으로 해도 나쁘지 않아요.) 베이킹 소다를 크게 한 스푼 탄 물에 밤을 하룻밤동안 담궈 둡니다. 저는 성격이 급해 이 과정은 건너 뛰었어요. 그래도 크게 문제는 없는 것 같더라구요. 베이킹 소다 푼 물 째 그대로 냄비에서 끓여 줍니다. 약불에서 30분 정도 끓여주세요. 베이킹 소다 때문에 끓이는 과정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불 옆에 서서 살살 저어주어야 해요. 안그러면 거품이 많이 생겨 냄비 밖으로 흘러 넘칩니다. 베이킹 소다로 끓이는 건 율피를 연하게 만드는 과정이에요. 베이킹 소다에 끓이면 율피 때무인지 물이 짙은 보라색이 됩니다. 

살살 저어야 사진처럼 밤이 깨지지 않아요. 깨진밤을 찾아보세요ㅣ

30분동안 끓였다면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다시 받아 또 30분 끓여주세요. 이 과정에서 밤에 찬 물보다는 따듯한 물이 닿게 해주세요. 찬 물이 닿으면 밤이 수축하면서 확실히 찬물이 닿지 않은 밤에 비해 작아지더라구요. 열심히 까고 끓였는데 밤이 작으면 속상하잖아유... 새 물을 받아도 율피에서 보라색 물이 계속 나옵니다. 다 끓이면 또 이 물을 버리고 또 한 번 더 끓여주세요. 총 세 번을 끓이고 나면 밤을 잘 헹궈서 껍질을 다듬어야 합니다. 심지처럼 질긴 부분을 이쑤시개를 이용해 빼주고, 먹을 때 걸리적 거릴 거 같다는 부분은 전부 제거해 주세요. 이 과정에서 역시 율피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미 오랫동안 끓인터라 밤이 물러져서 조심해야 해요. 깨끗하게 정리된 밤을 물에 씻어 다시 냄비에 올립니다. 이 때는 밤이 전부 잠길 정도로 물을 넣고, 밤 무게 절반의 설탕을 부어줍니다. 그리고 천천히 저어가면서 또 30분동안 약불에서 끓여주세요.  베이킹 소다 넣고 한번, 헹궈서 맑은 물에 두 번, 설탕 물에 한 번. 총 네 번을 끓입니다. 

처음에 끓일때는 물을 조금만 넣어서 밤이 다 잠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기지 않은 밤은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웠어요. ㅎ

보늬밤 밤조림을 보관할 유리병은 깨끗이 씻어 열탕소독까지해서 준비해 둡니다. 다 끓인 밤을 유리병에 넣어주고 다 식힌 후에 뚜껑을 닫아주세요. 며칠내로 다 먹을거라면 실온에서 보관해도 되지만 저는 아무리 열탕소독을 열심히 해도 실온에서는 역시 곰팡이가 표면에 피더라구요. 몇 주, 몇 달에 걸쳐 오랫동안 먹을거라면 냉장보관해 주세요. 이 때 원하는 맛을 가미해도 좋아요. 시나몬 스틱을 넣는다거나 건조한 귤이나 영화에서처런 브랜디를 넣어도 좋습니다. 가능하면 밤이 전부 설탕물에 잠기도록 해주세요.

 

저는 막 끓여서 따뜻한 밤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두, 세 달 뒤에 먹으면 밤에 설탕물이 다 스며들어서 더 맛있어진다고 하는데, 저는 이미 충분히 달기도 하고, 밤조림이 두 세달 씩이나 보관하기 전에 다 먹어버릴 것 같아 그냥 따뜻할 때 많이 먹었어요. 냉장보관할 때도 그릇에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려서 따뜻하게 먹었습니다. 보늬밤으로 밤라떼를 해 먹으면 또 아주 맛있습니다. 우유 한 컵 기준, 밤 세 알과 보늬밤의 설탕물 세 스푼정도를 넣고 갈아주면 정말 맛있어요. 먹을 때 위에 살짝 시나몬 가루를 뿌려주면 기가 끊임없이 먹을 수 있어요. 밑에 간 밤이 가라앉으니 잘 저어서 먹으면 됩니다. 이 간 밤의 식감이 아주 좋아요.

완성된 밤라떼

보늬밤은 왜 속껍질을 살릴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직접 요리해 보니 그 이유를 알겠어요. 밤을 오랫동안 끓이는 동안 속껍질이 있으면 밤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요. 또 율피 특유의 식감이 있어요. 누가 발명한 레시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천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보늬밤과 밤라떼 해 드셔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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