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제목으로는 Days of being wild. 거친 나날들 정도로 번역 할 수 있을까요. 아비정전은 아비의 이야기 정도의 뜻인데, 영어 제목이 더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기도합니다.

"물론이지, 내 생각에 한숨도 못 잤을 테니까."
"1960년 4월 16일 3시"

아비는 소위 나쁜 남자 입니다. 여자들에게 거침없이 다가 그녀들의 마음을 빼앗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을 옭아매는듯 하면 거리낄 것 없이 바로 내칩니다. 하지만 아비의 작업 멘트를 보면 그 누구도 넘어가지 않을리 없을것 같습니다. 매점에서 일하는 듯 한 소여진을 본 아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밤 꿈에서 당신은 나를 보게 될 거예요.". 소여진은 어이가 없지만 덤덤한척 다음날 아비에게 말합니다. "어젯밤 꿈에 당신을 보지 않았어요." 여기에 아비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당연하죠. 당신은 어젯 밤 내 생각에 한 숨도 못 잤을 테니까." 또 어느 날 아비는 소여진에게 시계를 보라며 붙잡아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1960년 4월 16일 3시 1분전. 이 시간을 당신은 평생 기억하게 될거예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려 지울 수도 없어요." 소여진은 정말 그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아비에게 결혼하자고 하는 소여진

이렇게 가까워진 아비와 소여진. 아비의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내던 소여진이 아비에게 같이 살아도되냐 묻습니다. 결혼도 하자고 합니다. 아비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 화가 난 소여진은 아파트를 나서면서 다시는 이 아파트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사람은 소여진입니다. 아비는 이미 다른 여자를 만나고, 소여진은 매일 밤 아비의 아파트 아래에서 서성이며 흐느낍니다. 항상 야간 순찰을 돌던 경찰은 아파트에 올라가지는 않고 울기만 하는 소여진을 위로해 줍니다.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는 소여진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함께 밤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마 경찰은 소여진에게 관심이 있지만 소여진의 마음에는 그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보입니다. 

아비를 잊지 못하는 소여진과 그녀를 위로하는 경찰

아비는 친구에게 발 없는 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발이 없는 새는 태어나자마자 날개를 부지런히 움직여 날아다녀야 합니다. 이 새가 날갯짓을 멈추는 순간은 바로 죽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발 없는 새 아비는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었습니다. 양어머니는 돈이 많아 아비가 일을 안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지만 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못합니다. 그에게 친 어머니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지요.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고 상처주는 관계를 끝내기 위해 양어머니는 아비에게 친어머니의 행방을 알려줍니다.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까지 찾아간 아비는 가정부로부터 어머니가 집에 안계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아비는 알고 있습니다. 친어머니가 자신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아비와 그의 새로운 여자 미미

아비의 새로운 여자 미미는 자기 멋대로인 아비에게 샘통도 나지만 그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말도없이 필리핀으로 떠나간 아비가 너무도 그리워 그를 찾기 위해 아비의 전 여자 소여진에게, 아비의 양어머니에게 찾아갑니다. 그런 그를 쫓아다니는 아비의 친구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아비가 하면 다 멋있어 보이고, 여자도 전부 아비를 사랑합니다. 그런 친구는 미미를 사랑하지만 미미의 눈에는 아비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친구는 아비가 자신에게 줬던 차를 판 돈을 미미에게 쥐어주며 필리핀으로 가 아비를 찾으라고 합니다. 거기서도 아비를 찾지 못하면 그때는 자신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처로운 부탁을 합니다. 

이비를 잊지 못하고 찾아오는 소여진

아비는 친어머니로부터 또 한 번 더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에 비관합니다. 술에 떡이 되어 위험한 밤거리에 아랑곳 않고 길바닥에 드러누워버립니다. 그런 그를 누군가가 도와 자신의 호텔방으로 데려옵니다. 선원이라고 하는 이는 아비와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기차역에 볼일이 있다는 아비를 따라갔다가 사고를 친 아비와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도망가는 길에 탄 12시간 짜리 기차를 타며 아비는 이 선원이 자신의 아파트를 순찰하던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또 그가 소여진을 위로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라도 그녀를 또 마주치면 이미 자신은 그녀를 다 잊었다고 전해달라 합니다. 아비가 소여진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이죠. 결국 자신을 쫓아온 갱에게 총을 맞은 아비는 그렇게 필리핀의 달리는 기차 속에서 죽습니다. 

Xabier Cugat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아비

스스로 발 없는 새라 생각하는 아비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면서 왜 죽을 걱정을 하냐고 합니다.  본인이 날개짓을 멈춘다면 바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아비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을 줄 여유는 없습니다. 날개짓 하기에도 벅차거든요. 

필리핀의 거리를 배회하는 아비

1990년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의 청춘스타들을 대거 출연시켰습니다.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유덕화, 양조위의 출연으로 관객들은 상당히 큰 기대를 하고 봤으나 국내에서는 흥행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홍콩 느와르, 액션 영화를 생각했던 관객의 기대와 달리 아비정전은 청춘의 삶과 감정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의 세계관을 시작이 되는 영화나 마찬가지 입니다. 영화 마지막 즈음 아비가 이미 죽고 난 뒤 소려진의 일상과 필리핀에 막 도착한 미미를 잠시 비춥니다.

나갈 채비를 하는 양조위의 모습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허리도 곧게 못 피고 앉을 만큼 천장이 낮은 방에서 양조위가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빗으며 나갈 채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양조위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 결말로 미루어 보아 분명 양조위가 나오는 2편이 제작될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2부작으로 계획된 영화였지만 해당 영화의 흥행 실패와 제작사의 파산으로 2부 제작은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왕가위는 후에도 아비정전 2편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이후에 나오는 영화들이 전부 아비정전의 속편의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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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시간 화양연화의 결말

화양연화를 보셨나요. 왕가위를 미쟝센 영화의 대가로 끌어올려준, 아름다운 연출의 화양연화. 영화를 직접 보지는 않았더라도 노래 Yumeji' Theme 이 흘러나오면서 영상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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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다룬 적이 있는 화양연화는 아비정전의 2부라는 힌트가 있습니다. 여주인공에게 계속 같은 이름이 사용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장만옥이 연기한 소여진과 화양연화에서 등장하는 집주인과 식모의 모습이 아비정전에서 양어머니와 그녀의 식모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운명의 장난인지, 소여진이 알고 그 집엘 찾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결혼한 후에도 아비와 엮이게 됩니다. 아비의  집에서 살게 된 그녀, 그런 그녀를 다급하게 뒤따라오는 차오역의 양조위. 어쩌면 이 둘이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은 전작 아비정전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가위의 다른 작품인 2046이라는 영화 역시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의 연장선상이라는 해석과 평이 있습니다. 화양연화에서 첸 부인과 차오씨가 만나던 호텔방이 바로 2046호 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왕가위의 영화는 단 한 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여러 편에 걸쳐 다채롭게 변주됩니다. 이런 점에 주목해서 영화를 즐긴다면 훨씬 더 재밌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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